'쌍거리, 삼거리' 현재 여서청사 아래의 MBC 입구 오림동과 문수동 및 한재터널 방향으로 나뉘는 삼거리로 아담한 논이 많았다.
'구랭이' 현재 여문초등학교 항상 물이 많아 논농사가 잘됐다.
'섶바지기' 현재 경남아파트쪽은 물이 귀했기 때문에 논에 물을 퍼대기가 일쑤였다.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를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1986년 6월 부터 주요 공공시설과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섰다. (사진=여수시)
▲1986년 6월 부터 주요 공공시설과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섰다. (사진=여수시)

⑩여서동

1789년을 기준으로 작성된 『호구총수』의 여수면에 읍지에는 현내면의 기동과 대치 리가 독립된 마을로 수록됐다. 1918년 지형도에 구봉산 북사면에 여서리가 표기되어있다. 장군산은 서쪽 평지에 논과 밭이 묘사됐다.

장군산에 있는 장군바위는 장군산 북쪽, 즉 현재 여서동 한영고등학교 바로 위에 있는 바위이다. 약 15m의 굴 위에 있어 ‘굴등바위’라했다.

옛날 장군이 공부를 했다는 돌의자와 돌책상이 있고 바위가 얼굴 모양을 하고 있어 큰 인물이 텃골 마을에서 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장군산의 장군바위는 암석이 규칙적으로 갈라져 기둥 모양을 이룬 주상절리로 지각 변동·습곡·풍화 작용·지표 침식 등에 의해 압력의 변화가 생길 때 형성됐다.

조선 후기 여수면에 포함된 지역으로 1914년 기동과 대치리를 합하여 여수군의 시가지 서쪽이 되므로 ‘여서리’라 했다. 1967년 여서동으로 이름이 바뀌어 이전까지 같은 리에 속한 돌곡 마을은 1986년 오림동에 편입됐다.

대치와 텃골의 전통 마을과 공동 주택 및 상가가 복합된 여수시의 대표적인 주거 및 상업 중심 지역이다.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몰려 있어 인구밀도와 주민들의 교육·문화 수준이 높은 지역이다.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던 여서동의 지형 변화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1986년 ‘여서·문수 지구 신도심 개발’ 사업에 따른 신도심권 형성이다. 이 개발 계획은 도시의 균형 발전을 위한 것으로 가장 대표적인 사업으로 시청 청사를 여서동에 새로 짓기로 한 것이다. 공사는 1986년 9월 5일 시작했다.

▲1980년대 여수시청
▲1980년대 여수시청

규모는 부지 6960평, 지하 1층, 지상 3층 건물로 연건평 2063평이다. 청사를 지을 땅 매입비 7억 7000만 원, 건축비 35억 5500만 원이 필요했다. 지금의 동문동 우체국인 당시 시청사를 13억 7000만 원에 팔고, 시유지 매각 대금 14억 5900만 원, 지방 청사 정비 기금 15억 등으로 마련했다. 1987년 10월 30일 준공돼 그해 12월 22일 48년 만에 여서동 신청사로 이전했다.

여수시의회, 여수지방해양수산청, 여수경찰서 여문파출소, 여수부영초등학교, 한영고등학교, 한영대학교를 비롯하여 여수의 중심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대치 大峙, 한재 마을

대치 마을은 구봉산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예로부터 신월동에서 한화 여수사업장을 거쳐 이 마을로 오는 고갯마루를 ‘한재’라 했다. ‘ᄒᆞᆫ’은 ‘크다’ 또는 ‘높다’를 뜻하는 우리 말로 ‘고개’를 합쳐 한자로 바꾸면서 지어진 땅 이름이다.

옛 여서동사무소가 있었던 큰 마을부터 여서동로터리에 이르기까지 작은 마을들이 흩어져 있었다. 진등 고개에서는 가막만이 시원하게 보이고, 신월동을 잇는 큰 농토가 있었다.

처음 마을이 형성된 곳은 ‘감낭골’로 감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감’은 ‘우두머리’, ‘크다’, ‘높다’라는 우리말로 ‘감골’은 큰 마을 또는 중심이 되는 마을을 나타내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

▲여수 구봉산 정상. (사진=여수시)

마을 뒤로 형성된 깊은 구봉산 계곡은 ‘큰텃골' 또는 ’큰덕골', 구봉산에서 한화 여수사업장 후문 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을 ‘진등’, 큰텃골에서 구봉산 정상을 향한 산줄기를 ‘속등’, 부영7차아파트에서 구봉산을 오르는 등산로에 편백숲이 많은 골짜기를 ‘심박골’이라 부른다.

큰텃골과 진등 사이의 산줄기는 ‘깨밋등’, 진등과 속등 사이의 조그마한 고개, 즉 잔등을 ‘깨밋등 속등’, 마을 뒤 왼쪽의 고개를 ‘큰까끔’ 또는 ‘잔디밭몬당’이라 불렀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개울로 ‘샘꼬랑’, ‘깨밋등 꼬랑’ 등의 땅이름이 있다.

우리말 ‘둠’은 덩어리를 의미해 마을의 한 부분을 나타낼 때 접미사처럼 쓰여 앞소리의 영향으로 ‘뜸’이나, ‘돔 또는 똠’으로 변했다. 대치 마을은 구봉산 계곡과 구릉 등의 지형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형성됐다.

이러한 지형을 활용하여 형성된 마을은 가장 먼저 자리잡은 ‘감낭골’, 현재 대치의 중심 역할을 하는 ‘중동’ 또는 ‘중똠’, 중돔에서 볼 때 큰텃골 건너편인 부영초등학교 후문 쪽에 자리잡은 ‘건너몰’, 일제 강점기 신월리에 해군 수상비행장과 미평역에서 비행장까지 철도를 놓으면서 사라진 마을 사람들이 한화 후문 쪽에 정착한 ‘갓뒤’가 있었다. 여서로터리 주변으로 개발된 ‘아랫돔’이 있다.

부영7차아파트 후문 등산로 입구에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있어 당산나무로 삼아 해마다 섣달그믐이 되면 당산제를 모셨다. 1976년 이 나무가 벼락을 맞아 죽게 되자 당산제도 중단됐다.

『여수동사』에 따르면 텃골 마을은 ‘텃골’이라 불렀던 것을 한자로 바꾸면 기동으로 표기됐다. 원래 큰 마을은 지금의 경남아파트 쪽에 있었다. 북풍이 심하고 농사지을 토지가 마을 아래에 있어 옮겨졌다. 정씨·백씨·최씨 등이 많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텃골마을 추념비.
▲텃골마을 추념비.

개발로 사라져버린 이 마을을 추념하기 위해 2016년 비석을 세웠다. 장군산 동북쪽에 있었던 돌고개 마을은 ‘돌곡’ 마을로도 불렸다. 1986년 행정구역이 조정돼 오림동에 포함됐다.

군터는 텃골 당산과 보리타작을 했던 보리마당 터 아래를 말한다. 군터라고 불러졌는지 알려지지는 않고 있다. 여수군이 설치될 때 여수군청을 세울 장소로 거론된 적이 있다거나, 스님이 터를 잡았다는설도 있다. 그 자리에 지금의 여서청사가 세워졌다.

쌍거리 또는 삼거리는 현재 여서청사 아래의 MBC 입구 오림동과 문수동 및 한재터널 방향으로 나뉘는 삼거리로 그곳은 아담한 논이 많았다. 삼거리가 교차되는 길목으로 텃골의 입구였다.

현재 여문초등학교가 있는 곳은 ‘구랭이’라 부르고, 항상 물이 많아 논농사가 잘됐다. 그 위인 현재의 경남아파트 쪽은 ‘섶바지기’라 하여 물이 귀했기 때문에 논에 물을 퍼대기가 일쑤였다.

또 경남아파트와 문수동 천주교 사이에 일제 강점기 때 화약을 보관했던 큰 창고가 있었다. 물이 스미지 않는 곳에 땅속 깊이 흙을 파낸 뒤 축대를 쌓고 배수 시설을 하여 콘크리트 건물을 세워 기와를 덮고 통풍이 잘되게 해 숲으로 위장했다고 한다.

텃골 마을 앞산인 구봉산 기슭의 한 부분이 풍수지리상 ‘개머리털’의 형상으로 이곳에 묘를 쓴 큰샘골 임씨는 여수에서 큰 부자가 되었지만 묘를 정비하면서 묘비와 상석을 세운 뒤 폐가가 됐다. 개머리털에 무거운 돌을 올려서 개가 힘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구봉산에는 높이 약 10m에 이르는 ‘칼바위’가 북쪽을 바라보고 있어 그모양이 신월동에서 바라보면 스님이 바랑을 메고 다가오는 모습으로 임산부가 보면 낙태를 하고, 이곳을 지나가는 나귀들은 소리를 내어 울었다고 한다.

그 뒤 여서동보다 마을 세력이 컸던 신월동 사람들은 그들이 피해를 입는다고 믿어 석공을 동원해 그 칼바위를 떨어냈다. 당시 떨어진 바윗 덩어리가 골 주택까지 굴러왔다고 한다. 구봉산 칼바위 밑에 샘이 있었으나 이 바위를 철거하면서 샘이 없어졌다. 샘물은 9마리의 봉황이 먹었던 물이라고 전해진다.

장군산에는 앞에서 본 장군바위를 비롯해 동북쪽에 마당처럼 넓다는 ‘마당바위’와 멍석처럼 넓고 놀기 좋다고 하여 부르는 ‘덕석바위’가 있다. 덕석바위 아래에는 우물이 있었다.

▲3여통합 전 여수시청사. (사진=여수시)
▲3여통합 전 여수시청사. (사진=여수시)

여서동은 1975년부터 1985년까지 평균 216세대 1156명이 거주하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1986년부터 시작된 ‘여서·문수 지구 신도심 개발 사업’으로 여수시청을 비롯해 대규모 아파트와 주택 지역이 형성됐다. 1990년, 1995년 이후 여수의 대표적인 주거 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1998년 기존의 여수시·여천시·여천군이 통합돼 하나의 여수시가 되면서 시청 청사가 옛 여천시청으로 옮겨지면서 일부 기능만 남게 되면서 상업과 주거 기능도 약화 되어 2005년부터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이는 전반적인 여수시 인구 감소와 더불어 주변 문수동과 웅천동 등에 새로운 대규모 아파트 건설 등이 크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여서동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 따르면 텃골에 청동기 시대 유적인 고인돌이 4곳에 분포하는 것으로 나타나 이 시기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서 문수 지구 신도심 개발 사업이 전개되면서 지형이 완전히 변해버려 유물이나 이후 역사에 관한 자료를 얻기 어렵다.

▲1986년12월 부터 여서. 문수지역과 여수 구 도심 일원으로 연결되는 한재도로. (사진=여수시)
▲1986년12월 부터 여서. 문수지역과 여수 구 도심 일원으로 연결되는 한재도로. (사진=여수시)

여수시청 청사를 여서동으로 옮김에 따라 구도심과 연결할 도로 개설이 요구되 구봉산과 장군산이 이어지는 한재에 400m의 터널을 뚫고 진입도로를 만들었다. 이 공사는 제1, 2단계로 나뉘어 진행됐다. 제1단계는 1986년 12월 26일 착공되어 광무로에서 370m의 길을 폭 25m 3차로로 내고 200m의 터널을 8.5m 너비로 뚫는 것이었다.

제2단계는 1989년에 착공되어 1300m의 길을 폭 13~25m, 200m의 터널을 8.5m 너비로 뚫어 총연장 1870m의 한재 간선 도로가 개설됐다. 하지만 이 터널은 편도 1차로로 하루 4만여 대의 각종 차량이 몰려 심한 정체 현상을 빚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한재 제2터널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따라서 2001년 12월 길이 390m, 너비 10m의 2차로인 터널을 뚫어 2005년 4월 8일 개통 됨으로써 기존의 터널은 광무동에서 여서동으로 넘어가는 상행선, 새로이 뚫린 터널은 여서동에서 광무동 방향으로 이동하는 차량이 이용하고 있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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