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특별법 기획] 여순사건, 그때를 되돌아본다(9)
[여순사건 특별법 기획] 여순사건, 그때를 되돌아본다(9)
  • 김충석
  • 승인 2020.07.28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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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 3기, 5기 여수시장

  10, 군인과 경찰의 힘겨웠던 순천과 여수 진압작전

 반란 소식을 들은 서울의 미 군사고문단 수뇌부는 1020일 오전에 관계자 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다. 이때는 이미 여수경찰서가 불타고 많은 경찰이 숨졌다는 보고를 입수한 뒤였기 때문에, 사건이 사소한 군경 충돌의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였다.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William H. S. Roberts)가 소집한 이 회의에는 미군 측에서 국방경비대 고문 하우스만(James Hausman) 대위, G-2 소속의 존 리드(John P. Read), 5여단 고문인 트레드 웰(J. H. W. Treadwell) 대위, 5여단 고문 프레이(Robert F. Frey) 대위가 참석했고, 국방경비대 측에서는 채병덕 총참모장, 정일권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백선엽 국방경비대 정보국장, 고정훈 국방경비대 정보장교가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여수 진압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일단 광주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체적인 진압작전은 1020일 오후, 서울에서 군 지휘부가 광주에 도착한 후에 수립되기 시작하였다.

육군총사령부는 1021일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광주 제5여단사령부에 설치하고 총사령관에 송호성 준장을 임명하는 한편, 진압작전에는 서울과 대북 경계를 담당하고 있는 병력 그리고 제주도 반란을 진압하는 데 투여된 병력을 제외한 모든 병력을 동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대전(2연대), 전주(3연대), 광주(4연대), 부산(5연대), 대구(6연대), 군산(12연대), 마산(15연대)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 가운데 총 11개 대대가 진압에 투입되었다.

이들 병력 중 제2, 6, 12, 15연대는 원용덕이 지휘하는 제2여단으로 편성되었고, 3, 4연대는 김백일이 지휘하는 제5여단에 편성되었다.

부산의 5연대는 해안경비대와 함께 여수 앞바다에서 해상작전을 전개하였다.

학구전투는 진압군과 반란군이 맞붙은 첫 번째 전투였을 뿐만 아니라, 어제의 동료였던 반란군에게 총을 겨눌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무대였다.

학구전투 승리 이후의 진압작전은 순천 탈환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순천을 탈환하는 것은 전체적인 정세를 바로잡는 중요한 계기였다.

1021,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의 송호성 사령관을 만나 반란군을 맹공격 할 것을 촉구하고 정치적,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순천과 여수를 조속히 탈환하는 것이 중요하며, 반란세력으로부터 이곳을 탈환하는 것은 선전상 중대한 가치를 갖는 도덕적, 정치적 승리가 될 것이다.” 미군 지휘부는 반란군이 빨치산 세력으로 전환되는 것보다 여수와 순천이 아직도 반란군 수중에 장악되었다는 점을 더욱 우려했고, 이에 따라 조속한 여수와 순천 탈환을 요구하였다.

이승만 대통령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정부를 해치려는 사람은 결국 이 나라에는 살지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여, 강경한 탄압을 예고하였다.

1022, 3, 4, 12연대의 병력은 박격포 사격을 해대며 순천 공격을 재개하였다. 이날 전투는 순천 시내로 들어오는 입구인 매곡동 근처에서 치열하게 벌여졌고, 중화기의 무차별 사격으로 시내에는 주검들이 쌓여갔다.

날이 어두워지자 진압군은 공격을 멈추었다. 12연대를 주력으로 하는 진압군은 저항세력의 움직임을 파악한 L-4 연락기의 정보를 적절히 활용하여 1023일 오전에 순천 진압작전을 펼쳤다.

순천진압작전을 주도했던 제5여단장 김백일은 반군 외에도 무기를 소지한 치안대. 학생, 민애청원들이 대항했기 때문에 이를 적발하기 위해 가가호호를 수색했고, 가담자들을 붙잡아 처벌하기 시작하였다.

순천사범학교와 순천매산중학에 다니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사형장에서 구해, 양자로 삼은 여수 신풍애양원교회 손양원 목사의 거룩한 인간애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순천을 탈환하자 송호성 준장은 각 여단장과 지휘관을 순천에 모아, 여수 탈환작전과 각 방면으로 분산한 반란군 추격 작전을 논의하였다.

송호성 준장은 1024일 오후 3, 처음으로 진압작전의 선두에 나섰다.

공격부대는 송석하 부연대장이 지휘하는 3연대 1개 대대와 장갑차부대였고, 5연대 병력을 비롯한 해안경비대 경비정들은 여전히 여수 주변 항구를 완전히 봉쇄하고 있었다. 송호성은 반란군을 설득하려고 확성기를 통해 반란군 청년 장병들에게 호소했으나 대화가 쉽지 않았다.

송호성이 여수 초입인 일명 잉구부(현 성학맨션 뒤 옛 국도 17호선)에 이르렀을 때, 매복하고 있던 반란군은 기습을 감행하였다. 이 공격으로 송호성은 고막이 터지고, 종군기자로 참가했던 AP통신의 크린튼은 전사하였다.

송호성은 반란군의 반격에 놀라 긴급히 후퇴했고 상륙작전도 실패하였다.

24일 오전 8시경, 해안경비대 경비정으로 여수 신항에 상륙하려다 철수했고, 두만강호를 비롯한 3척은 반란군이 예암산(남산)에서 일본 99식 소총으로 사격하는 것을 무릅쓰고 장군도와 구항을 통과하여 신월리 앞바다에 한 시간쯤 머물면서, 14연대가 출동하고 텅 빈 신월리 정세를 살핀 후에 다시 돌아왔다.

육지와 해안을 통한 여수의 2차 공격도 실패로 돌아가자, 이승만 대통령은 반란 1주일이 지나도록 여수를 탈환하지 못하다니 이게 무슨 창피냐?” 하면서 진압군을 질책하였다.

여수탈환작전은 지리산 방면으로 퇴각하는 반란군들의 추격보다도 더 시급한 문제로 대두(擡頭)되었다. 병력을 집중하여 여수를 공략하려는 작전계획이 수립되는 동안, 여수에 있던 반란군은 섬진강을 거쳐 지리산으로 잠입하였다.

1024일에 진압군을 비록 격퇴하기는 했지만, 여수를 향해 국방경비대의 병력이 총동원될 것이라는 점을 예상했고, 관련 정보도 들었기 때문이다. 바다는 해안경비대 경비정들이 봉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탈출은 불가능하였다.

이날 밤 남아 있던 지창수 지휘 하의 14연대 반란군들은 본격적인 진압을 예감하고 24일 오후 5시경에 한국은행 여수지점에서 2,100만 원을 가지고, 백운산과 벌교방면으로 급히 이동하였다.

해안에 비하여 육상루트는 어느 정도 열려 있었다. 진압군의 허점을 이용해 여수를 탈출한 반란군과 이미 지리산으로 들어간 부대들은 산악지대를 이용하여 장기적이고 지구적인 빨치산(게릴라전)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제 여수에는 인민위원회가 지휘하는 300명 미만의 시민부대가 남아 있을 뿐이어서, 여수시가지 전투는 반란 진압작전으로부터 반란 주민 소탕 작전으로 변화하였다. 1025, 육상과 바다 양면을 통한 제3차 진압작전이 재개되었다.

육지의 김백일 부대와 협조하라는 미 고문관의 지시를 무시한 부산 5연대의 김종원 대위는 상륙작전을 시도 하였지만 또 다시 실패하였다.

1026, 정오가 지나서 진압부대는 여수에 대한 제4차 최종 공세를 폈다. 장갑차와 LST의 박격포 사격의 지원을 받은 12연대 2개 대대, 순천에 있던 4연대 일부 병력, 3연대 1개 대대와 2연대의 일부 병력, LST에 승선 중이던 5연대 1개 대대, 장갑차부대, 경찰지원부대가 여수로 진격했고, L-4 항공기 등과 해안경비대 경비정이 여수반도를 포위한 채 공중과 해상에서 진압작전을 도왔다. 주공인 12연대는 시가지 공격에서 동쪽을 담당하여 장갑차를 앞세워 시내로 들어갔다. 3연대는 종고산 쪽에서 시내 쪽으로 진입하였다.

한편 2여단 군수참모 함병선 소령이 지휘하는 2연대 제1대대는 예비대로 해안선을 따라 신항 쪽에서 시내로 들어왔다. 함병선의 예비부대는 상륙지점을 확보하기 위해 부두로 향했으나, 부두 부근에서 저항세력과 충돌하였다.

이미 14연대 병력이 퇴각한 뒤였기 때문에 여수 초입인 미평은 쉽게 통과했고, 오후 3시경에는 구봉산, 종고산, 장군산 등의 고지(高地)를 점령할 수 있었다.

3시경 외곽고지(外廓高地)를 점령한 진압군(鎭壓軍)은 곧이어 시가지에 대한 박격포 사격을 고지와 바다에서 전개하였다. 박격포 사격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뒤에, 각 연대는 시내로 돌입(突入)하여 민가를 가가호호 수색하였다.

광양에 있던 4연대 제2대대도 시내 수색작전(搜索作戰)에 참가(參加)하였다.

4연대 병력을 지휘한 박기병 소령은 여수지구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진압사령부는 여수군청(공화동 19498월부터 여천군청)에 설치되었다.

그동안 반군들의 동향을 보면, 1021일 아침 김지회가 지휘하는 2개 대대는 순천을 점령하고, 홍순석 중위와 함께 보성, 학구, 광양 세 방향으로 떠났고, 26일 진압군이 여수에 들어왔을 때의 여수에는, 지창수가 지휘하던 1개 대대 병력과 주요 좌익인사들과 추종자들은 이미 육로로 도피해 버린 뒤였다.

26일 여수에는 반란군들이나 좌익인사들의 말만 믿고 정세파악을 전혀 하지 못하고 세상이 뒤바뀐 줄 알고, 총을 들고 멋모르고 부화뇌동하며 날뛰던 인민위원들과 추종자 300여 명이 남았을 뿐이고, 일반 주민들은 이제 살았구나 하고 안심하고 있었다.

1026일 장갑차를 타고 시내로 돌진한 12연대와 작전에 참가한 진압군은 밤이 되자, 소탕전을 중지하고 본부를 여수서국민학교에 둔 다음, 산발적인 저항세력의 공격에 대비하여 경계에 들어갔다.

진압군은 시민들에게 확성기로 여수서국민학교, 역전공설운동장(여수중학교 앞 1954년 전국중학교대항축구시합 중에, 말이 지뢰를 밟아 터져, 폐쇄되고 주택과 상가가 들어섬), 여수동국민학교, 진남관, 여수종산국민학교(현 중앙교) 등 다섯 군데에 모두 모이라고 확성기로 방송하였다.

나오지 않으면 반란군으로 간주 된다.’는 말을 듣고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껴 시민들은 모이라는 장소에 나왔다. 무장군인들은 총을 들고 길거리에서 이탈자를 감시하였다. 줄에서 이탈하면 반란군으로 간주 되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끌려왔던 사람들은 곧 심사라는 것을 받게 되었.

생존 경찰관을 선두로 우익진영 요인들과 진압군 병사로 이루어진 5~6명의 심사요원들이 시민들을 줄줄이 앉혀놓고 사람들의 얼굴을 쑥 훑고 다니다가 저 사람하고 손가락질만 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학교 뒤에 파놓은 구덩이 앞으로 끌려가 불문곡직하고 즉결처분(총살)하였다.

가가호호 수색을 하며, 주민들을 학교로 모이라는 진압군들
가가호호 수색을 하며, 주민들을 학교로 모이라는 진압군들

<계속~>

[여수인터넷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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