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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

'춤추는 정원' 연재 (6)
외부와 차단된 정원, 정원 속에서 의식도 함께 성장해
출산 과정에서 부닥친 죽음과 같은 위기는 업의 정화 과정

  • 입력 2019.10.19 15:26
  • 수정 2020.04.25 17:17
  • 기자명 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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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가장 큰 매력은 무언가가 ‘숨겨’ 있다는 점이다. 화려하거나 멋있진 않지만 외부 세계와 거의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고 나무가 자라면서 정원은 더욱 완벽한 ‘비밀의 공간’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나무들이 자랄수록 정원도 커간다. 면적은 그대로인데 나무가 위로 자라면서 공간 또한 성장하는 것이다.

신비롭게도 그와 함께 내 ‘의식’도 함께 커가는 것 같다. 매일 드나드는 나무문이지만 이 문을 열 때마다 내 의식이 나무의 키만큼 커지는 것을 느낀다. 아파트의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의식은 넒은 정원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확장된다.

정원에서의 행복의 본질은 관념과 사념의 세계로부터의 해방감이다.

오래 전, 그러니까 정원을 가꾸기 전 내 에고의 정체를 꿰뚫어 본 극적인 영적 체험을 한 적이 있다. 짧지만 강렬했던 체험은 지금도 생생하게 의식 속에 살아남아 나의 에고가 나를 괴롭힐 때마다 상기되곤 한다.

 

극적인 깨달음의 순간

매주 수요일 열리던 명상 강의에서는 깨달음에 대한 토론이 열리곤 했다. 수행의 목표는 깨달음이 아니라 내면의 욕망을 활짝 꽃피우는 것이라는 교수님의 관점에도 불구하고 강의시간에는 늘 깨달음에 대한 토론으로 열기가 가득했다.

당시 발등에 떨어진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바빴던 나는 깨달음 같은 고매한 체험은 나와 거리가 먼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삶의 거칠고 힘든 문제가 해결됐음에도 답답하고 불만족스러운 감정이 여전히 내면 깊숙이 웅크리고 있었다.

결국 1998년 연말, 휴가를 맞아 내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체험을 떠났다. 특별한 프로그램 없이 오로지 혼자서만 명상을 통하여 자신과 대면할 작정이었다. 강원도의 어느 수련단체를 가면 독방을 빌려준다는 말에 당장 깊은 산골짜기로 향했다.

늦은 밤 창문을 열어보니 겨울 찬바람이 씽씽 몰아치는 허허벌판이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멀리 눈 덮인 겨울 산이 병풍처럼 희미하게 보이고 새까만 밤하늘 가득 은빛 별들이 총총히 떠 있었다.

‘흩어졌던 가족도 다시 모이는 연말인데 왜 나는 이곳에 홀로 왔을까. 무엇이 나를 이렇게 수행으로 내모는 것일까.’

그런 생각에 눈물도 한두 방울 흘렸던 것 같다. 내 삶이 왜 이다지도 힘든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삶인데 왜 나는 유독 이렇게 힘들게 느껴지는지,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강한 에고는 삶을 온통 ‘전쟁터’로 만들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5일째 되는 날 오후, 나는 얇은 잠옷 같은 옷 하나 걸치고 수련원 마당에 몸을 던졌다.

순간 깨달음이 왔다. 아니 깨달음이 나를 덮쳤다. 밖으로만 향하던 의식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짧은 찰나의 순간에 ‘나’를 본 것이다.

우리의 자아감, 다시 말하면 에고는 항상 ‘밖’으로만 열려 있는 에너지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의 신경회로도 항상 그쪽 방향으로만 작동한다.

그러나 어떤 특이한 변성의식 상태에서 의식이 지속적으로 ‘안’쪽으로 향하게 되면 신경회로의 극적인 변화로 새로운 형태의 앎과 에너지 상태를 체험하게 된다. 다시 말해 깨달음의 체험은 단순히 의식 속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라 몸의 ‘생화학적’ 변화를 동반하는 체험인 것이다.

깨달음은 수학적이다

깨달음을 체험한 뒤 나는 나의 체험이 어떻게 해서 일어났고, 다른 수행자들의 체험이 나의 체험과 어떻게 유사한지 알아보기 위해서 여러 책을 뒤져 보았다.

내 경우 극단적인 단식이나 수행을 통한 강한 업장정화의 체험은 없었지만 강렬한 죽음을 상상함으로써 예민한 나의 에고가 가짜 죽음을 진짜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보여진다.

특히 죽음 앞에서 우리는 가장 극적인 참회를 한다. 그 참회는 자신 안의 부정적인 업을 소멸할 수 있고, 업의 소멸로 투명해진 의식은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출산 과정에서도 난 이와 유사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

아이를 출산한 날은 토요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진통이 서서히 시작되었지만 자연스런 출산 과정은 꽤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서두르지 않고 오후쯤 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병원에서 무리하게 터뜨린 자궁의 양수로 출산과정은 몹시도 고통스러웠다. 게다가 과다출혈로 생명이 위급한 상황이었다.

지금도 내 몸에서 피가 빠져 나가면서 몸이 서서히 식어 갈 때의 기억이 선명하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당황하면서 온갖 조치를 하는 위급하고 부산한 상황에서도 왠지 평화로웠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죽어갈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생명 하나 남기고 가는구나….’

다행히 출혈이 멈춰 목숨은 건졌지만 밤새 남편의 손을 잡고 중얼중얼 참회의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건 내가 의식적으로 한 말들이 아니었다. 죽음과 같은 위기 앞에서 깊은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회한과 슬픔, 고통스런 감정이 저절로 풀려 나왔던 것이다.

지금도 출산 과정은 강력한 ‘업의 정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깨달음의 체험을 원한다면 죽음과 맞먹는 정화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 정화의 체험으로 자신의 에고가 완전히 내려지고, 머릿속 영상이 갑자기 정지되었을 때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깨달음의 성격과 수준에 대해서도 이견이 분분하지만 나는 깨달음을 예술에 비교하고 싶다. 예술의 경지에 대해서 어떤 경지가 최고인지 쉽게 논할 수 없듯이 영적 체험에 대해서도 그 경지를 다투기는 어렵다.

누군가는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알고 있는 깨달음이 당신같이 평범한 사람이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불완전한 거냐고. 그건 당신이 지어낸 당신만의 주관적인 깨달음이 아니냐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깨달음이든 아니든, 그것을 무엇이라 지칭하든 간에 그 체험은 내 영적 여정에 확실한 지표가 되는 체험이었다.

그리고 이런 비웃음을 무릅쓰고 내가 체험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평범한 사람도 어떤 권위에 기대지 않고 깨달을 수 있고, 주체적으로 자신만의 영적인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진리와 깨달음을 통한 자유로움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기존의 모든 권위부터 의심해 보아야 한다. 강원도에 가기 전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인도의 성자 라마나 마하리쉬 책에 나온 구절 하나를 소개한다.

"누구나 깨달음 속에 있는데 자신이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는 생각이 깨달음의 가장 큰 방해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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