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루
진해루
현재 국보304호로 지정된 국내 최대의 목조건물인 진남관은 임진왜란 때는 없었던 것이다. 원래 있던 진해루가 1597년에 불타 없어지자 1598년 12월에 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시언 통제사가 그 자리에 건물을 복원하고 진남관이라고 명명하였다.
임진년 침략 때(1592) 그 당시 전쟁을 수행하는데 가장 필요한 군량미와 소금의 주산지인 호남을 점령하지 못했던 일본군은 정유년 재 침략 때(1597)는 해군사령부 격인 수군통제영이 있었던 여수를 먼저 침략하였다.
그리하여 전라좌수영성 안에 있던 동원과 진해루외 대부분의 건물을 불살라 버렸는데 이때 진해루도 불타 없어졌다.
진해루는 건립 당시부터 너무 커서 불경스럽다는 여론이 일자 역대 임금의 궐패를 걸고 초하루와 보름, 두 차례 역대 왕에게 제사지내기 위하여 크게 지었다고 했다고 한다.
진해루는 임진왜란 중 전라, 충천, 경상 3도 수군통제영(사령부)으로서 막중한 역사의 현장을 지킨 통제영의 객사사로 전라좌수영 영민들과 애환을 함께한 전라좌수영 영민들의 혼이 긷든 건물이다.
1592년 일본군 15만 명이 부산에 침략하여 3일만에 경상남도가 함락되고 경상수군이 패전하여 바다로 쫓겨나와 전라좌수여 본영에 구원을 연이어 요청했을 때 이순신통제사가 5월 1일에 진해루에서 작전회를 열어 출병 여부를 의놀할 때의 기록은 여수 후손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어 준다.
충무공 444회 생신을 맞아 필자(문정인)는 방송을 나가기에 앞서 가슴으로 피어오르는 감회를 다음과 같은 시구로 읊어 보았다. 그리고 청소년 교육이나 민방위교육 때 시간 말미에 꼭 낭송해주며 여수인의 자부심을 당부하였다.
진해루 작전회의
임진년 4월 열사흘날
일본왜군 십오만 쳐들어 오니
사흘만에 부산이 함락되고
열아흐레만에 한양이 함락되어
전국토가 왜적에게 짓밟히고
남은땅은 호남땅 뿐이었네
우리백성 모두가 임진왜란을
조선과 일본의 싸움이래나
기실은 호남과 일본과의
긴긴 칠년간의 전쟁이었네
경상도 구원요청 전해 듣고서
진해루 작전회의때 정운장군이
나라 구하는데 구역이 왠 말이며
경상도 전라도가 어디있오
이기면 다행이고 지더라도
국록을 먹는 백성으로
부끄러움이 없지 않소라 셨네
조용히 눈을 감고 계시던 충무공
내 이미 출전을 각오한 바나
너희들의 뜻을 알고자 했을 뿐이다
오월 초사흘 새벽출전을 명령하니
반대 하는자는 목을 베리라
전라좌수영 본영 여수 사람들
다도해를 끼고 살아 물길에 밝아
민족 성웅 이충무공 앞장 세우고
배를 뭇고 창칼 제작 곡식을 일궈
칠년간의 긴긴 전쟁 승리 했으나
약무호남 시무국가 글월 올리고
구국성지 구국백성 칭송 얻었네
선조 임금 감읍하여 충민사 사액내리고
옥형 자운 두스님이 은공 기리며
나라제사 온 백성이 함께 모셨네
그러나 구국성지 여수백성들
긴긴 칠년전쟁 치르느라고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몽땅 잃고
제고장 세울힘도 잃어 버렸네
충민사 나라제사 빼앗겨 버리고
사적지정 못받아 지방기념물
국보급 진남관은 보물로 되고
영의정 이항복이 울며 적으신
대첩비 비문도 울고 있다네
부하수졸 푼돈모아 눈물로 세운
타루비도 엉엉엉 울고만 있네
죽으나 사나 함께 하자던
충무공 한 분만이 외가에 누워
나라안 곳곳에서 제사 지내나
함께 죽은 수군원혼 제사 없으니
북녘 하늘 바라보며 눈물 흘리네
충무공 갑옷입고 가보지 않은
아산땅 성지되어 서광을 얻고
패전소식 전해 듣고 달려가 구한
경상도땅 성지되어 빛을 내는데
충무공 손때 묻은 여수 유적 어찌나되고
나라 구한 여수백성 어찌나 됐나
청천의 하늘님은 아시겠지요
[1989.4.28. 충무공 444회 탄신일에 문정인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