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일제감점기 - 여수읍
정의
1910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될 때까지의 전라남도 여수의 역사.
- 1920년대 여수군농회
- 1929년 원산총파업
- 김홍식 작업실 터
- 여수경찰서
- 여수세관
- 옛 여수군청
변천
1895년 전라좌수영이 폐지되고, 1896년 도서 지방에 돌산군이 신설되고, 1897년 육지 지역에 여수군이 신설됨으로써 순천도호부에서 분리 독립되어 여수·율촌·삼일·소라의 4개 면을 관할하였다. 후에 여수면이 현내면과 쌍봉면으로 분리되는 등 7개 면으로 분할되었다. 1914면 돌산군이 폐지되었고, 그 관내의 5개 면이 여수군으로 편입되어 10개 면으로 분할되었다. 1931년 여수면이 여수읍으로 승격하였다.
- 원세학 영세불망비
- 일본군 고사포 터
- 일본군 고사포 터 안내문
통치기구와 시설
여수군농회
1926년 4월에 전국적으로 농회가 설치되었고 여수군에도 여수군농회가 설립되었다. 농회는 농업의 개량과 발전을 도모하는 공공 단체로 지금의 농업협동조합과 같은 성격의 기관이었으나 전국적으로 군청 내에 설치되어 사실상 군 행정의 보조 기관이었다. 1927년 여수군농회는 좌수영성의 운주헌 자리에 있던 목조 건물로 된 군 청사에서 공화동 1094번지(구 여천군청사)로 신축 이전했다. 이때 군수는 후지타니 지로[藤谷次郞]이었다.
여수읍사무소
1940년 8월에는 1897년 여수군 설군 당시부터 관문동 1118번지에 초라한 기와집으로 있던 여수읍사무소를 관문동 199번지인 현 우체국 위치로 신축 이전하였다. 이 청사 건물은 3대 읍장인 다다 요시이치[多田義一]가 1939년 6월부터 누차 입찰에 붙였으나 예정가 초과로 계속 유찰되자 마지막에 가서는 진주의 일본인 건축업자 오오에 시게하루[大江重春]에게 당시 돈 57,000원에 수의 계약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건물은 팽창하는 읍세(邑勢)를 감안하여 장차 부(府)로 승격할 것에 대비하여 아예 여수부 청사용으로 지었던 건물로서, 공사 기간이 1년 가량 걸렸으며 그 때의 읍세는 7,515호에 인구는 37,813명이었다.
여수경찰서
1906년 일본이 통감부를 설치하고 일본식 경찰 제도를 그대로 이식했다. 1906년 12월 15일 여수에 광주경무서 장흥분서 여수분파소 및 광주고문지부 장흥분견소 여수분파소라는 기다란 이름의 경찰 관서가 생겨, 경무고문보조원 통감부 순사 2명과 순검 4명을 배치하고 여수군 일원을 관할하게 한 것이 여수경찰서의 시작이다.
이어서 1907년 5월 25일 순천경무분서가 설립되었고, 1908년 7월 사법권을 강탈당한 뒤 순천분견소와 분서를 합하여 순천경찰서로 개편되자 여수분파소는 순천경찰서 여수순사주재소로 개칭되었다. 그 뒤 1910년 7월 순천경찰서 여수순사주재소를 철폐하고 순천에는 헌병분견대를 두는 대신 여수에는 경찰서를 두게 되어 순천경찰서장 이하 전원이 여수로 옮겨왔다.
이와 동시에 여수군과 돌산군의 두 군을 관할하게 되면서 고금도·태인도·돌산도·나로도·세동(덕양)에 주재소를 두었다. 그 뒤 1914년 3월 1일 돌산군이 여수군으로 합병되자, 여수경찰서는 현내(여수)·쌍봉·삼일·소라·화양·율촌·돌산·남면·화정·삼산의 10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에 소라·두남(돌산)·거문도·화양에 주재소를 두고, 현내·삼일·쌍봉의 3개 면을 본서 직할로 하였다. 소라주재소는 소라와 율촌을, 화양주재소는 화양과 화정 일부를, 두남주재소는 돌산과 남면 및 화정의 일부를, 거문도주재소는 삼산면을 관할하였다.
한편 이보다 앞선 1909년 9월 10일부터 여수읍 내에 해상경비소를 설치하고 소장과 경비선 6척을 배치하며 의병 소탕을 맡게 했다가 1911년 6월 1일 철폐하고 이 사무는 여수경찰서로 넘겨졌다. 경비선은 목포경찰서로 철수하고 그 대신 제9작환(鵲丸)을 배치했다.
여수수산제품검사소
1908년 9월 목포상공회의회 소속으로 발족한 여수수산물검사소는 1913년 9월에는 세관 소속으로 옮겨진 뒤 1918년 9월 수산제품검사소로 개칭되었고 1937년에 총독부 식산국 소속 여수수산제품검사소가 되었다.
여수세관여수세관
여수세관여수세관은 1911년 4월에 목포세관 여수감시서로 첫 발족하였으나 물동량이 없어서 이름뿐이었다. 1912년에는 일본 아마가[尼崎] 기선회사가 오사카와 목포 사이에 항로를 트면서 여수에 기항하기로 하고 대리점을 두었으나 물동이 없어서 곧 철수해 버렸다.
1923년 여수가 지정항이 된 뒤 목포세관 여수출장소가 되면서 물동량이 약간 늘었다. 1924년 1월부터 조선우선주식회사 소속의 함경마루[咸鏡丸]가 오사카와 제주 사이를 월 2회 취항하면서 여수에 기항하게 되자 물동량이 더 늘어나기 시작해 어렵사리 제구실을 하게 되어, 1926년에는 연간 무역액이 85만 원을 기록하였다.
1927년에는 무역 진흥책의 일환으로 연간 8천 원의 선박 보조비를 지급하면서, 여수-오사카 사이의 항로를 월 7회로 늘이도록 유도하자 무역액도 괄목할 만큼 많이 증가하였다. 1943년에는 교통국 소관으로 옮겨져 여수부두국(麗水埠頭局)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 미군정 때 재무부로 환원돼 여수세관감시서로 개칭되었다.
곡물검사소
곡물검사소는 1915년 10월 총독부령 제4조에 따라 「미곡검사규칙」이 공포됨에 따라 설립된 여수곡물검사소에서 출발하였다. 1918년에는 가마니 검사까지를 겸하게 되어 업무량이 많이 늘어났고 1922년 7월 총독부령 제4호로 규칙이 다시 개정되어 백미 검사를 새로 추가하게 되었다. 이때 검사소는 군청에 있다가 현 서울신탁은행 뒤의 창일식당 자리로 옮겨졌다. 1922년 8월에는 종래의 조직을 개편하여 「곡물검사소규칙」을 새로 제정하여 조직을 확충하였다.
전주전매국 광주지국 여수전매서
1917년 7월 전국에 엽연초조합이라는 민간 조합이 생겨났고 1921년 7월 1일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전매령」이 공포되어 그때까지 자유 경작에 맡겨졌던 담배 경작을 통제하자 전국이 발칵 뒤집혔다. 1921년 10월 1일에는 엽연초조합 여수영업소가 생겼으며 1927년 2월 25일에는 조선원매팔주식회사(朝鮮元賣捌株式會社) 순천지점 여수영업소라는 이름으로 바뀌더니 1931년 7월 1일에는 관영으로 옮겨져 전주전매국 광주지국 여수전매서로 개칭되었다.
신월리 해군비행장
일제는 1942년 8월경 앞바다가 ㄷ자형을 이루고 있는 신월리의 지형을 이용해 일본 해군비행장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평역에서 비행장까지 인근 철도를 놓아야 했고, 철도 부지를 다듬기 위해서는 신근마을, 물구미마을, 봉양마을을 철거해야 했다. 이에 따라 이들이 이주하여 생겨난 마을이 현재의 샘기미마을이다. 신월리 해군비행장 공사는 일본 토목 회사들이 맡아서 했는데, 인부들은 여수를 비롯한 전라남도 동부 6군에서 끌려온 근로보국대들로, 2개월씩 교대로 와서 일을 해 해방이 될 때까지 90%의 공정을 완료하였다.
항일운동
3·1운동
여수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가 순천을 통해 율촌과 여수읍 내에 전달되기는 하였으나 구체적인 운동은 없었던 것 같다. 4월 1일에는 쌍봉면·소라면·율촌면 세 곳에서 산발적인 소규모의 만세 사건이 일어났었고, 또 그날밤 돌산면·화정면·남면·삼산면 등 4개 면에서 일부 어민들이 산발적인 시위 운동을 벌였다고는 하나 만세 운동으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서울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귀향한 유봉목(兪鳳穆)은 12월 12일 당시 여수수산학교 재학생인 이선우(李善雨)와 더불어 주로 학생층을 대상으로 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종포에 사는 같은 수산학교 학생인 조 아무개의 밀고로 사전에 정보가 누설됨에 따라 시위 주동자들은 검거되고 말았다. 대구복심법원에서 유봉목은 징역 10월, 이선우는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맞돕회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공부하던 여수의 유학생들은 재경여수유학생회를 만들어 평소에도 상호간의 친목과 단결을 돈독히 했음은 물론 민족이나 국가관 같은 것에 대하여도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3·1운동이 터지자 재경여수유학생회는 전단을 인쇄하거나 전단지를 뿌리기도 하고 연락을 도맡고 나서는 등 직접 간접으로 3·1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사건이 탄로나 학교에서 퇴학당하거나 자퇴당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향에 내려온 이들은 우리 민족이 서로 믿고 맞잡고 돕자는 뜻에서 1921년 5월경 '맞돕회'라는 계몽 단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민중 계몽 운동과 활동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사업으로 이발소와 쌀가게 등을 운영하였다. 한편, 좌수영의 좌청 건물을 입수하여 건축자재를 확보하고 덕지라는 연못을 메워 2층의 한옥과 양옥을 절충한 청년회관을 건립하여 여수 청년들의 기개를 선양하였다.
여수수산학교 학생들의 항일운동
광주학생운동이 폭발했다는 소식이 여수에 전해지자 여수수산학교 학생 200여 명이 궐기하여 시위를 벌였다. 이때 여수수산학교 학생들이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하여 시위와 그에 관한 격문을 살포했다는 혐의로 검거되었다. 퇴학 12명, 정학 9명의 처분이 내려지자 1930년 1월 28일 퇴학 또는 정학된 학생들의 조속한 복교와 구속 학생의 석방을 촉구하는 맹휴를 감행하였다.
새 학년이 시작되자 그 여세를 몰아 졸업생인 윤경현(尹炅鉉)의 협조를 얻어 광주학생운동의 비밀 결사인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독서회 회원들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매주 1회씩 기숙사, 등대산, 종고산, 장군도 또는 종포 하숙집 등을 전전하면서 집회를 가졌다.
1930년 10월 광주학생운동 관계로 처벌당한 동지 백인렬의 조속한 복교 조치와 교사진 및 학교 시설의 보강을 요구하는 동맹 휴업이 터졌다. 이를 계기로 22명이 검거되어 결국 이용기(李容起)와 윤경현은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다. 나머지 20명도 옥고를 겪었으며 이들은 모두 여수공립수산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당하였다. 당시 퇴학 처분을 당한 학생들은, 3학년은 이용기·정학조·오놀보·곽재석·김봉칠·진자미·김랑호, 2학년은 백인렬·조병호·정보한·차용헌·박경임·강임룡·김재곤·정림구·이금룡·박창래, 1학년은 고자화·이창용·손대형·강근오 등이었다.
1942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한창 진행되면서 창씨개명, 일본어 강요뿐 아니라 일본인 학생들로 하여금 한국인 학생들을 감시하게 하고, 한 번 제보가 되면 교무실로 끌려가 호된 기합을 받았으며 세 번 이상 적발되면 정학 처분을 내리는 등 가혹한 단속이 계속되었다. 이때 졸업반 학생 대표 박용수(朴容守)·김옥(金玉)·이강제(李康濟) 세 사람은 각 학년 대표들과 은밀히 짜고 각 학년 별로 태극기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배부해 주고 언젠가 전 학생들이 한번 들고 일어나 우리들의 기개를 단단히 보여 주자고 벼르고 있었다.
1942년 11월 상순 어느 기념식 날 아침, 전 학생들이 열을 지어 있는데 기념식장에서 교장 고토 히로요시[後藤廣吉]가 일본 천황이 「청년 학도에게 내리는 조서」를 낭독하려 하자 전 학생들이 갑자기 삼삼오오 열을 지어 교문을 빠져나가 버렸다. 이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와 모국어 사용과, 민족 차별이 심한 교사의 퇴출을 요구하였다.
4일이 지나 경찰이 주모급 학생들의 집을 급습하여 태극기를 찾아내고 60여 명의 관련자들을 검거해 버렸다. 그 결과 주모자 박용수·이강제·김옥 세 사람은 구속 송치되고 나머지는 훈계 방면되었다. 이들 세 사람은 광주로 송치되었다가 이다[依田] 검사에 의해 기소 유예로 풀려났으나 학교에서는 퇴학 처분을 받았다.
참고문헌
- 『여수·여천향토지』 (여수·여천향토지편찬위원회, 1982)
- 『여수·여천향토지』 (여수·여천향토지편찬위원회, 1982)
- 『여수항일운동사』 (여수시·여수지역발전협의회·여수항일운동사편찬위원회, 2006)